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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덕선생전, 열녀함양박씨전, 김신선전(국역)
2003.12.24 | 조회수 : 8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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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덕선생전


선귤자의 벗 가운데 '예덕선생'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종본탑(宗本塔) 동쪽에 살았는데, 날마다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똥을 져 나르는 것으로 직업을 삼았다. 늙은 일꾼을 '향수'라고 불렀는데, 그의 성이 엄이었다. 어느 날 자목이라는 제자가 선귤자에게 물었다.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듣기를 '벗이란 동거하지 않는 아내요, 동기(同氣) 아닌 아우다' 하였으니, 벗이란 게 이처럼 소중하지 않습니까? 온 나라 사대부들 가운데 선생님의 뒤를 따라 하풍(下風)에 놀기를 원하는 자가 많건마는, 선생님께서는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저 '엄 향수'라는 자는 시골의 천한 늙은이로 일꾼같이 하류 계층에 처하여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데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자꾸 그의 덕을 칭찬하면서 '선생'으로 부르고, 마치 머지 않아 벗으로 사귀고자 청하시려는 듯합니다. 제자인 저로서는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오니, 이제 선생님 문하를 떠나려 합니다."
선귤자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가만 있거라. 내가 네게 벗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리라. 속담에도 있지 않더냐? '의원이 제 병 못 고치고, 무당이 제 춤 못 춘다.'는 격으로, 사람마다 저 혼자 좋아하는 취미가 있어서 남들은 알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딱하게도 그의 허물을 찾으려고 애쓴단 말이야. 그러나 부질없이 그를 칭찬하기만 하면 아첨에 가깝기 때문에 멋이 없고, 오로지 그를 헐뜯기만 한다면 마치 잘못된 점만 꼬집어 내는 듯해서 비정스럽거든.
그래서 그의 아름답지 못한 점들부터 널리 들어가서 그 가장자리에나 어정거리되, 깊이 파고들진 않는 법이다. 그러고 보면 비록 그를 크게 책망하더라도 그는 노여워하진 않게 되거든. 왜냐하면 아직까지는 자기가 가장 꺼리는 곳을 꼬집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러다가 그가 좋아하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면 마치 어떤 물건을 점쳐서 알아낸 듯 마음속에서 느낌이 오는데, 마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처럼 되지.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데에도 방법이 있거든. 잔등을 어루만지되 겨드랑이 까진 이르지 말 것이며, 가슴팍을 만지더라도 목덜미 까진 침범하지 말아야 돼. 그래서 중요치 않게 이야기가 그친다면, 그 모든 아름다움은 저절로 내게 돌아오는 법이지. 그도 기뻐하면서 '참으로 나를 알아주는 벗'이라고 말할 거야. 벗이란 이렇게 사귀면 되는 거지."
이 말을 들은 자목이 귀를 막고 뒷걸음질치면서 말하였다.
"선생님께서는 제게 시정 잡배나 머슴 놈들의 행세를 가르치시는군요."
선귤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자네는 이런 것은 부끄러워하고, 저런 것은 부끄러워하지는 않는군. 시정 잡배의 사귐은 이익으로써 하고, 얼굴의 사귐은 아첨으로 하는 법이거든.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사일지라도 세 번만 거듭 부탁하면 틈이 벌어지지 않는 사람이 없고, 아무리 오래 묵은 원한이 있더라도 세 번만 거듭 선물하면 친절해지지 않을 사람이 없지. 그러기에 이익으로서 사귀는 것은 계속되기 어렵고, 아첨으로써 사귀는 것도 오래 가지는 않는 법이야. 대체로 커다란 사귐은 얼굴빛에 있지 않고, 아주 가까운 벗은 친절이 필요하지 않은 법이지. 오로지 마음으로 사귀면 덕으로 벗할지니, 이게 바로 '도의(道義)의 사귐'이야. 그러면 위로는 천 년 전의 사람을 벗하더라도 멀지 않을 것이며, 만 리 밖의 떨어져 있더라도 소외되지 않게 되지.
그런데 저 엄항수라는 이는 일찍이 나에게 지면(知面)을 요구한 적이 없었지만, 나는 언제나 그를 칭찬하려는 마음이 간절하였다네. 그의 손가락은 굵직굵직하고, 그의 걸음새는 겁먹은 듯 하였으며, 그가 조는 모습은 어수룩하고, 웃음소리는 껄껄대더구먼. 그의 살림살이도 바보 같았네. 흙으로 벽을 쌓고 볏짚으로 지붕을 덮어구멍 문을 내었으니, 들어갈 때에는 새우등이 되었다가, 잠잘 때에는 개 주둥이가 되더구먼. 아침해가 뜨면 부석거리고 일어나, 흙 삼태기를 메고 동네에 들어가 뒷간을 쳐 날랐지. 9월에 서리가 내리고, 10월에 엷은 얼음이 얼어도 뒷간의 남은 찌꺼기와 말똥, 쇠똥, 또는 횃대 아래에 떨어진 닭, 개, 거위 따위의 똥이나, 입회령(   :돼지똥), 좌반룡(左攀龍:사람똥), 완월사(玩月 :닭똥), 백정향(白丁香:닭똥) 따위를 가져오면서 마치 구슬처럼 여겼지. 그래도 그의 청렴한 인격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을뿐더러, 혼자 그 이익을 차지하면서도 정의에 해로움이 없었으며, 아무리 탐내어 많이 얻기를 힘쓴다고 하더라도 남들이 그더러 '사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않거든.
이따금 손바닥에 침을 뱉고 나서 가래를 휘두르는데, 경쇠처럼 굽은 그 허리가 마치 새 부리처럼 생겼더군. 비록 찬란한 문장이라도 그의 뜻에는 맞지 않고, 아름다운 종이나 북소리도 그는 거들떠보지 않았어. 부귀란 것은 사람마다 모두 원하는 것이지만, 그리워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근 부러워하지 않았다네. 남들이 자기를 칭찬해 준다고 해서 더 영광스럽게 여기지도 않았고, 자기를 헐뜯는다고 해서 더 욕되게 여기지도 않는 거지.
왕십리의 배추, 살곶이다리의 무, 석교(石郊)의 가지, 오이, 수박, 호박, 연희궁의 고추, 마늘, 부추, 파, 염교 청파의 물미나리, 이태인(이태원)의 토란 따위를 심는 밭들은 그 중 상(上)의 상을 골라 쓰되, 그들이 모두 엄씨의 똥을 써서 기름지고 살지고 평평하고 풍요러워, 해마다 육천 냥이나 되는 돈을 번다는거야. 그렇지만 엄 향수는 아침에 밥 한 그릇만 먹고도 기분이 만족해지고, 저녁에도 한 그릇 뿐이지. 남들이 그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권하면, '목구멍에 내려가면 나물이나 고기나 마찬가지로 배부른데, 왜 맛있는 것만 가리겠소?'하면서 사양했다네. 또 남들이 새 옷을 입으라고 권하면, '넓은 소매 옷을 입으면 몸에 익숙지 않고, 새 옷을 입으면 길가에 똥을 지고 다니지 못할 게 아니오?'하면서 사양했다네.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이 되면 비로소 갓을 쓰고 띠를 띠며, 새 옷에다 새 신을 신었지. 이웃 동네 어른들에게 두루 돌아다니며 세배를 올리고, 다시 돌아와 옛 옷을 찾아 입더군. 다시금 흙 삼태기를 메고는 동네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거지. 엄 향수야 말로 자기의 모든 덕행을 저 더러운 똥 속에다 커다랗게 파묻고, 이 세상에 참된 은사(隱士) 노릇을 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옛 글(논어)에 이르기를 '본래 부귀를 타고 난 사람은 부귀를 행하고, 빈천을 타고난 사람은 빈천을 행해야 한다.'고 하였다네. 이 말에서 '본래'란 하늘이 정해 준 분수를 뜻하는 거지. 또 {시경}에 이르기를

아침부터 밤까지 관청에서 일하시니
타고난 운명이 나와는 다르다네

하였으니, '운명'이란 것도 분수를 말한다네. 하늘이 만물을 낳으실 때에 제각기 정해진 분수가 있었으니, 운명은 본래 타고난 것인데 그 누구를 원망하랴. 새우젓을 먹을 때에는 달걀이 생각나고, 굵은 갈옷을 입으면 가는 모시를 부러워하는 법일세. 천하가 이래서 어지러워지는 법이니, 농민이 땅을 빼앗기면 논밭이 황폐해지게 마련이지. (진시황의 학정에 반대하고 일어선) 진승, 오광, 항적의 무리로 말하더라도, 그들의 뜻을 호미나 고무래 따위에 두고 어찌 편안히 있겠는가? {주역}에 이르기를 '짊어진 사람이 수레에 탄다면 도둑에게 빼앗길 것이다'하였으니, 이를 두고 한 말이라네. 그러므로 정의가 아니라면 비록 만종(萬鍾)의 녹이라도 조촐하지 않을 것이요, 힘들이지 않고 재산을 모은 사람은 소봉(素封:부자)과 어깨를 겨눌 만큼 부유해지더라도 그의 이름을 더럽게 여기는 이가 있는 법이지. 그러므로 사람이 죽을 때에 구슬과 옥을 입에다 넣어 주는 것은 그의 깨끗함을 밝히는 거라네.
엄항수는 똥과 거름을 져 날라서 스스로 먹을 것을 장만하기 때문에, 그를 지극히 조촐하지는 않다고 말할는지는 모르겠네. 그러나 그가 먹을거리를 장만하는 방법은 지극히 향기로웠으며, 그의 몸가짐은 지극히 더러웠지만 그가 정의를 지킨 자세는 지극히 고항(高抗)했으니, 그의 뜻을 따져 본다면 비록 만종의 녹을 준다고 하더라도 바꾸지 않을 걸세. 이런 것들로 살펴본다면 세상에는 조촐하다면서 조촐하지 못한 자도 있고, 더럽다면서 더럽지 않은 자도 있다네. 그래서 나는 음식을 먹다가 차마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차려졌을 때에는 반드시 나보다도 못한 사람을 생각했다네. 그런 엄항수의 경지에 이른다면 견디지 못할 게 없겠지.
누구든지 그 마음에 도둑질할 뜻이 없다면 엄항수를 갸륵하게 여기지 않을 사람이 없을 거야. 그의 마음을 미루어 확대시킨다면 성인의 경지에라도 이를 수 있을 거야. 선비의 얼굴에 가난한 기색이 나타나면 부끄러운 일이거든. 또 뜻을 얻어서 영달했다고 하더라도 그 교만이 온 몸에 흐른다면 역시 부끄러운 일이지. 그들을 엄항수에게 견주어 본다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드물 거야. 그러니 내가 엄항수더러 스승이라고 부를지언정 어찌 벗이라고 부르겠는가? 그러기에 내가 엄항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예덕선생'이라고 호를 지어 바쳤다네."

열녀함양박씨전

제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열녀는 두 사내를 섬기지 않는다."
고 하였다. 이는 <시경>의 '백주'편과 같은 뜻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법전(경국대전)에서는 '다시 시집 간 여자의 자손에게는 벼슬을 주지 말라'고 하였다. 이 법을 어찌 저 모든 평민들을 위해서 만들었겠는가? (이 법은 벼슬을 하려는 양반들에게만 해당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가 시작된 이래 4백년 동안 백성들은 오래오래 교화(敎化)에 젖어 버렸다. 그래서 여자들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집안의 높낮음도 가리지 않으면서, 절개를 지키지 않는 과부가 없게 되었다. 이것이 드디어 풍속이 되었으니, 옛날 이른바 '열녀'가 이제는 과부에게 있게 되었다.
밭집의 젊은 아낙네나 뒷골목의 청상과부들을 부모가 억지로 다시 시집 보내려는 것도 아니고 자손의 벼슬길이 막히는 것도 아니건만, 그들은 "과부의 몸을 지키며 늙어 가는 것만으로는 수절했다고 말할 만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광명한 햇빛을 스스로 꺼버리고 남편을 따라 저승길 걷기를 바란다. 불.물에 몸을 던지거나 독주를 마시며 끈으로 목을 졸라매면서도 마치 극락이라도 밟는 것처럼 여긴다. 그들이 열렬하기는 열렬하지만 어찌 너무 지나치다고 하지 않겠는가?
옛날 어떤 형제가 높은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어는 사람의 벼슬길을 막으려고 하면서 그 어머니에게 의논드렸다. 그 어머니가
"무슨 잘못이 있길래 그의 벼슬길을 막느냐?"
하고 묻자 그 아들이,
"그의 선조에 과부가 있었는데 바깥 여론이 몹시 시끄럽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깜짝 놀라며,
"규방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고 물었더니, 아들이
"풍문으로 들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어머니가 말하였다.
"바람은 소리만 나지 형태가 없다. 눈으로 살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아도 얻을 수가 없다. 공중에서 일어나 만물을 흔들리게 하니 어찌 이따위 형편없는 일을 가지고 남을 흔들리게 한단 말이냐? 게다가 너희들도 과부의 자식이니, 과부의 지식으로서 어찌 과부를 논할 수 있겠느냐? 잠깐만 기다려라.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줄 게 있다."
어머니가 품속에서 동전 한 닢을 꺼내 보이면서 물었다.
" 이 돈에 윤곽이 있느냐? "
"없습니다"
"그럼 글자는 있느냐?"
"글자도 없습니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헀다.
"이게 바로 네 어미가 죽음을 참게 한 부적이다. 내가 이 돈을 십 년동안이나 문질러서 다 닳아 없어진 거다. 사람의 혈기는 음양에 뿌리를 두고, 정욕은 혈기에 심어졌으며 사상은 고독에서 살며 슬픔도 지극하단다. 그런데 혈기는 때를 따라 왕성한 즉 어찌 과부라고 해서 정욕이 없겠느냐?
가물가물한 등잔불이 내 그림자를 조문하는 것처럼 고독한 밤에는 새벽도 더디 오더구나. 처마 끝에 빗방울이 뚝뚝 떨어질 때나 창가에 비치는 달이 흰빛을 흘리는 밤 나뭇잎 하나가 뜰에 흩날릴 때나 외기러기가 먼 하늘에서 우는 밤, 멀리서 닭 우는 소리도 없고 어린 종년은 코를 깊이 고는 밤, 가물가물 졸음도 오지 않는 그런 깊은 밤에 내가 누구에게 고충을 하소연하겠느냐? 내가 그때마다 이 동전을 꺼내어 굴리기 시작했단다.
방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둥근 놈이 잘 달리다가도, 모퉁이를 만나면 그만 멈추었지. 그러면 내가 이놈을 찾아서 다시 굴렸는데, 밤마다 대여섯 번씩 굴리고 나면 하늘이 밝아지곤 했단다. 십 년 지나는 동안에 그 동전을 굴리는 숫자가 줄어들었고 다시 십 년 뒤에는 닷새 밤을 걸러 한 번 굴리게 되었지. 혈기가 이미 쇠약해진 뒤부터야 이 동전을 다시 굴리지 않게 되었단다. 그런 데도 이 동전을 열 겹이나 사서 이십 년 되는 오늘까지 간직한 까닭은 그 공을 잊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야. 가끔은 이 동전을 보면서 스스로 깨우치기도 한단다."
이 말을 마치면서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껴안고 울었다. 군자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이야말로 '열녀'라고 말할 수 있겠구나."
라고 하였다. 아아 슬프다. 이처럼 괴롭게 절개를 지킨 과부들이 그 당시에 드러나지 않고 그 이름조차 인멸되어 후세에 전해지지 않은 까닭은 어째서인가? 과부가 절개를 지키는 것은 온 나라 누구나가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한 번 죽지 않고서는 과부의 집에서 뛰어난 절개가 드러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안의(安義)고을을 다스리기 시작한 그 이듬해인 계축년(1793) 몇 월 며칠이었다. 밤이 장차 샐 즈음에 내가 어렴풋이 잠 깨어들으니 청사 앞에서 몇 사람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드렸다. 그러다가 슬퍼 탄식하는 소리도 드렸다. 무슨 급한 일이 생겼는데도 내 잠을 깨울까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제야 소리를 높여
"닭이 울었느냐?"
하고 물었더니.,곁에 있던 사람이 대답했다.
"벌써 서너 번이나 울었습니다."
"바깥에 무슨 일이 생겼느냐?"
"통인(通引 : 심부름꾼) 박상효의 조카딸이 함양으로 시집가서 일찍 과부가 되었습니다. 오늘 지아비의 삼년상이 끝나자 바로 약을 먹고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 집에서 급하게 연락이 와서 구해 달라고 하지만 상효가 오늘 숙직 당번이므로 황공해 하면서 맘대로 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빨리 가보라'고 명령하였다. 날이 저물 무렵에,
"함양 과부가 살아났느냐?"
고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묻자,
"벌써 죽었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나는 서글프게 탄식하면서
"아아 열렬하구나. 이 사람이여. "
하고는 여러 아전들을 불러다 물었다.
"함양에 열녀가 났는데, 그가 본래는 안의 사람이라고 했지. 그 여자의 나이가 올해 몇 살이며 함양 누구의 집으로 시집을 갔었느냐? 어릴 때부터의 행실이 어떠했는지 너희들 가운데 잘 아는 사람이 있느냐?"
여러 아전들이 한숨을 쉬면서 말하였다.
"박씨의 집안은 대대로 이 고을 아전이었는데 그 아비의 이름은 상일(相一)이었습니다. 그가 일찍이 죽은 뒤로는 이 외동딸만 남았는데 그 어미도 또한 일찍 죽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할아비.할미의 손에서 자라났는데 효도를 다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 열아홉이 되자 함양 임술증에게 시집와서 아내가 되었지요. 술증도 또한 대대로 함양의 아전이었는데 평소에 몸이 여위고 약했습니다. 그래서 그와 한 번 초례(醮禮)를 치르고 돌아간 지 반 년이 채 모 되어 죽었습니다. 박씨는 그 남편의 초상을 치르면서 예법대로 다하고 시부모를 섬기는 데에도 며느리의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고을의 친척과 이웃들 가운데 그 어진 태도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 정말 그 행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한 늙은 아전이 감격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그 여자가 시집가기 몇 달 전에 어는 사람이 말하길 '술증의 병이 골수에 들어 살 길이 없는데 어찌 혼인날을 물리지 않느냐'고 했답니다. 그래서 그 할아비와 할미가 그 여자에게 가만히 알렸더니, 그 여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답니다. 혼인날이 다가와 색시의 집에서 사람을 보내어 술증을 보니 술증이 비록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폐병으로 기침을 했습니다. 마치 버섯이 서있고 그림자가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답니다.
색시집에서 매우 두려워하며 다른 중매쟁이를 부르려 했더니, 그 여자가 얼굴빛을 가다듬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지난번에 바느질한 옷은 누구의 몸에 맞게 한 것이며 또 누구의 옷이라고 불렀지요? 저는 처음 바느질한 옷을 지키고 싶어요' 그 집에서는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원래 잡았던 혼인날에 사위를 맞아들였습니다. 비는 비록 혼인을 했다지만 사실은 빈 옷을 지켰을 뿐이랍니다."
얼마 뒤에 함양 군수 윤광석이 밤중에 기이한 꿈을 꾸고 감격하여 <열부전>을 지었다. 산청 현감 이면제도 또한 그를 위하여 전을 지어주었다. 거창에 사는 신도향도 문장을 하는 선비였는데, 박씨를 위하여 그 절의(節義)를 서술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이 한결같았으니 어찌 스스로 "나처럼 나이 어린 과부가 세상에 오래 머문다면 길이길이 친척에게 동정이나 받을 것이다. 이웃 사람들의 망령된 생각을 면치 못할 테니, 빨리 이 몸이 없어지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랴?
아아, 슬프다. 그가 처음 상복을 입고도 죽음을 참은 것은 장사를 지내야 했기 때문이었고 장사를 끝낸 뒤에도 죽음을 참은 것은 소상(小祥)이 있기 때문이었다. 소상을 끝낸 뒤에도 죽음을 참은 것은 대상(大祥)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대상도 다 끝나서 상기(喪期)를 마치자, 지아비가 죽은 것과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죽어 그 처음의 뜻을 이루었다. 어찌 열부가 아니랴?

김신선전

김신선의 이름은 홍기다. 나이 열 여섯 살 때에 장가들어서, 한 번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런 뒤에 다시는 아내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곡식을 물리치고 벽만 바라보고 앉았더니, 두어 해 만에 몸이 별안간 가벼워졌다. 국내의 이름난 산들을 두루 찾아 노닐면서, 늘 한숨에 수백 리를 달리고는 해가 이르고 늦음을 따졌다. 다섯 해 만에 신을 한 번 바꿔 신었으며, 험한 곳을 만나면 걸음이 더 빨라졌다. 그가 언젠가 말하기를
"옷을 걷고 물을 건너거나 달리는 배를 타면, 내 걸음이 오히려 늦어진다."
하였다. 그는 밥을 먹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고 여름에도 부채질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신선'이라고 불렀다.
내가 예전에 우울증이 있었다. 그때 마침 '김선생의 방기(方技)가 가끔 기이한 효과를 내기도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그를 더욱 만나고 싶어했다. 윤생과 신생을 시켜서 남들 몰래 서울 안에서 그를 찾았지만, 열흘이 지나도 찾지를 못했다. 윤생이 이렇게 말하였다.
"지난번에 '김홍기의 집이 서학동에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에 지금 가 보았더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촌 형제들 집에다 자기 처자식만 부쳐 두었더군요. 그래서 그의 아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우리 아버지는 한 해에 서너 번 다녀가시곤 하지요. 아버지 친구 한 분이 체부동에 사시는데, 그는 술 좋아하고 노래도 잘 부르는 김봉사라고 한다오. 누각동에 사는 김 첨지는 바둑 두기를 좋아하고, 그 뒷집 이만호는 거문고 뜯기를 좋아하지요. 삼청동 이만호는 손님 치르기를 좋아하고, 미원도 서초관이나 모교 장첨사 그리고 사복천에 사는 병지승도 모두들 손님 치르기와 술 마시기를 좋아합니다. 이문(里門) 안 조봉사도 역시 아버지 친구라는데 그 집엔 이름난 꽃들을 많이 심었고, 계동 유판관댁에는 기이한 책들과 오랜 된 칼이 있었지요. 아버지가 늘 그 집들을 찾아다녔으니, 당신이 꼭 만나려거든 그 몇 집들을 찾아보시오.'
그래서 그 집들을 두루 다녀 보았지만, 어느 집에도 없었습니다. 다만 저녁나절에 한 집에 들렸더니, 주인은 거문고를 뜯고 두 손님은 잠자코 앉아 있더군요. 흰머리에다 갓도 쓰지 않았습디다. 저 혼자서 '아마 이 가운데 김홍기가 있겠지.' 생각하고 한참이나 서 있었습니다. 거문고 가락이 끝나길래 앞으로 나아가서, '어느 어른이 김선생이신지요?'하고 물었습니다. 주인이 거문고를 놓고는 '이 자리에 김씨는 없는데 너는 누구를 찾느냐?'하더군요. '저는 몸을 깨끗이 하고 찾아 왔으니, 노인께서는 숨기지 마십시오.'했더니 주인이 그제야 웃으면서 '너는 김홍기를 찾는구나. 아직 오지 않았어.'하였습니다. '그러면 언제 오나요?' 하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해 주더군요.
'그는 일정한 주인이 없이 머물고, 일정하게 놀러 다니는 법도 없지. 여기 올 때에도 미리 기일을 알리지 않고, 떠날 때에도 약속을 남기는 법이 없어. 하루에 두세 번씩 지나 갈 때도 있지만, 오지 않을 때에는 한 해가 그냥 지나가기도 하지. 그는 주로 창동(남창동, 북창동)이나 회현방(회현동)에 있고, 또 동관. 이현(梨峴), 동현(銅峴:구리개), 자수교, 사동, 장동, 대릉, 소릉 사이에도 가끔 찾아다니며 논다고 하더군. 그러나 그 주인들의 이름은 모두 알 수가 없어. 창동의 주인만은 내가 잘 아니, 거기로 가서 물어 보게나.'
곧 창동으로 가서 그 집을 찾아가 물었더니, 거기서는 이렇게 대답합디다.
'그이가 오지 않은 지 벌써 여러 달이 되었소. 장창교에 살고 있는 임동지가 술 마시기를 좋아해서 날마다 김씨와 더불어 내기를 한다던데, 지금까지도 임동지의 집에 있는지 모르겠소.'
그래서 그 집까지 찾아갔더니, 임동지는 여든이 넘어서 귀가 몹시 어둡더군요.

그가 말하길. '에이구, 어젯밤에 잔뜩 마시고 아침나절 취흥에 겨워 강릉으로 돌아갔다우.' 하길래 멍하니 한참 있다가 '김씨가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지요. 임동지가 '한낱 보통 사람인데 유달리 밥을 먹지 않더군.'하기에 '얼굴 모습은 어떤가요?' 물었지요. '키는 일곱 자가 넘고, 여윈 얼굴에 수염이 난 데다, 눈동자는 푸르고, 귀는 길면서도 누렇더군.' 하기에, '술은 얼마나 마시는가요?' 물었지요. '그는 한잔만 마셔도 취하지만, 한 말을 마셔도 더 취하지는 않아. 그가 언젠가 취한 채로 길바닥에 누웠었는데, 아전이 보고서 이레 동안 잡아 두었었지. 그래도 술이 깨지 않자, 결국 놓아주더군.' 하더군요. '그의 말솜씨는 어떤가요?' 물었더니 '남들이 말할 때에는 문득 앉아서 졸다가도, 이야기가 끝나면 웃음을 그치지 않더군.' 합디다. '몸가짐은 어떤가요?' 물었더니, '참선하는 것처럼 고요하고, 수절하는 과부처럼 조심하더군.'하였습니다."
나는 일찍이 윤생이 힘들여 찾지 않았다고 의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신생도 수십 집을 찾아보았는데, 모두 만나지 못하였다. 그의 말도 윤생과 같았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홍기의 나이는 백 살이 넘었으며, 그와 함께 노니는 사람들은 모두 기인이다."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 홍기는 나이 열 아홉에 장가들어서 곧 아들을 낳았는데, 지금 그 아이가 겨우 스물밖에 안 되었으니, 홍기의 나이는 아마 쉰 남짓일 거야."
하였다. 어떤 사람은
"김신선이 지리산에서 약을 캐다가 벼랑에 떨어져 돌아오지 못한 지 벌써 수십 년이나 되었다."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아직까지도 그 어둠침침한 바위틈에서 무엇인지 반짝반짝 빛나는 게 있다."
하였다. 그러자 또 어떤 사람이
"그건 그 늙은이의 눈빛이야. 그 산골짜기 속에선 이따금 길게 하품하는 소리도 들려."
하였다. 그러나 지금 김홍기는 '오직 술이나 잘 마실 뿐이지, 무슨 술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그의 이름만을 빌려서 행할 따름이다.'는 소문만 들린다. 그래서 내가 또 동자(童子) 복을 시켜서 그를 찾아다니게 하였지만, 끝내 찾지 못하였다. 그 때가 계미년이었다.
그 이듬해 가을에 내가 동쪽 바닷가에서 놀다가, 저녁 무렵 단발령에 올라 금강산을 바라보았다. '그 봉우리가 일만 이천'이라고 하는데, 그 산빛이 희었다. 산에 들어가니 단풍나무가 가장 많아서, 바야흐로 붉어가고 있었다. 사리, 느릅, 여자 따위가 모두 서리를 맞아 노랗게 되었고, 으루나무와 전나무는 더욱 푸르렀다. 그 밖에 사철나무가 많았는데, 산 속의 기이한 나뭇잎들이 모두 누렇고 붉었다. 둘러보면서 즐기다가 가마를 멘 스님에게 물었다.
"이 산속에 혹시 도술을 통달한 이상한 스님이 있는가요? 더불어 노닐고 싶소."
"그런 스님은 없고, '선암에 벽곡( 穀)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영남에서 온 선비라고 하는데, 알 수 없습니다. 선암에 이르는 길이 험해서, 그곳까지 가 본 사람이 없답니다."
밤중에 장안사에 앉아서 여러 스님들에게 물었지만, 모두 같은 대답을 하였다. 또
"벽곡하는 사람이 백 일을 채우면 떠난다고 하는데, 이제 거의 구십 일은 되었습니다."
하였다. 나는 '그 이가 아마도 신선이겠지' 싶어서, 매우 기뻤다.
밤중에라도 곧 찾아가고 싶었다. 이튿날 아침 진주담 밑에 앉아서 같이 놀러 온 친구들을 기다렸다. 오랫동안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모두들 약속을 어기고 오지 않았다. 마침 관찰사가 여러 고을을 순행하는 길에 금강산까지 들어와, 여러 절간에 묵으며 노닐고 있었다. 수령들이 모두 찾아와 음식을 장만하고,나가 놀 때마다 따르는 스님이 백여 명이나 되었다. 게다가 선암까지 이르는 길이 높고 험해서 나 혼자는 갈 수 없으므로, 늘 영원암 백탑 사이에만 오가며 마음이 서운했다. 마침 비가 오래도록 내리므로 산 속에서 엿새나 머물렀다. 그런 뒤에야 선암에 이르게 되었다.
선암은 수미봉 아래에 있었다. 내원통에서 이십 여리를 가면 천길이나 되는 커다란 바위가 깍은 듯이 서 있는데, 길이 끊어져서 쇠사슬을 잡고 공중에 매달려서 올라갔다. 그곳에 이르자 빈 뜨락에는 새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탑(榻) 위에는 조그만 구리 부처가 있고, 다만 신 두 켤레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나는 못내 섭섭해서 어정거리며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바위 벽에다 이름을 쓰고는 한숨을 내쉬면 떠났다. 그곳에는 언제나 구름 기운이 둘러 있었고, 바람조차 쓸쓸했다.
어떤 사람은
"선(仙)이란 산에 사는 사람이다."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산 속으로 들어가는게 바로 선( )이다."
하였다. 선(僊)이란 선선(僊僊)케 가벼이 공중으로 들려 오른다는 뜻이니만큼, 벽곡하는 자라도 반드시 신선은 아닐 것이다. 울울(鬱鬱)히 뜻을 얻지 못한 자가 바로 신선일 것이다.

-'함께하는 고전여행'에 실린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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